스테퍼 케이스. 간만에 해본 아주 훌륭한 게임입니다. 챕터는 총 5개가 있고 현재 사이드 스토리 1까지 나온 상태입니다. 7월 18일에 Case 5 이후의 스토리를 다룬 2번째 사이드 스토리가 나온다니 기대가 되네요. 레드핀즈 전 반장과 노트릭 현 반장의 후일담이 너무 궁금합니다. 노트릭 말하는거 보니 모솔이라면서 아주 선수던데 레드핀즈의 마음을 아주 휘잡아 버렸으면..ㅎ
스테퍼 케이스란 게임의 이야기를 끌고 가는 설정은 단연 '스테퍼'라 불리는 초능력자입니다. 보통 초능력자 하면 일반적으론 긍정적으로 묘사되기 마련이지만, 이 세계관에서는 아주 위험한 취급을 받습니다. 스테퍼들을 분류하는 등급의 이름이 무기 이름으로 묘사되죠. Unarmed, Bowie, Colt, Estienne.. 여담이지만 Bowie는 군용 나이프를 뜻하고, Estienne는 프랑스 전차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인물이라는군요. 뒤에 나오는 Oppenheimer도 그렇고 등급 이름은 비유적으로 지은 것 같네요.
등급 이름에서도 짐작할 수 있지만 스테퍼들은 기본적으로 위험하다는 취급을 받으며, 관리의 대상이고, 생활에 직접적인 제한을 받습니다. 한마디로 감시, 제재, 관리 대상으로 봅니다. 관리국에서 스테퍼들은 과장 이상의 직급에 앉히지 않는다는 것으로도 간접적으로 짐작할 수 있죠.
이 세계관에서 스테퍼들은 왜 이렇게 공포의 대상이 되는 것일까요? 챕터 4에서 등장하는 노아 등급의 존재를 보면 충분히 그럴만 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좀더 마음의 밑바닥에 던지는 질문입니다. 왜 인간은 미지의 대상 혹은 초월적인 힘 앞에 공포에 떠는 것일까요?
뜬금없지만 저는 챕터 4를 플레이하면서 예전에 꿨던 꿈을 떠올렸습니다. 저는 아니지만 세 명의 어린아이들이 있었습니다. 세 아이들은 초등학교 저학년 정도의 나이대였지만 아주 비범한 천재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겐 부모도 집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자신이 가진 능력을 뽐냈죠. 이 소식을 들은 정부는 세 아이들이 국가 체제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해 군부를 동원해 세 아이들을 무참히 살해한 후 슬럼가의 쓰레기통에 시체를 버렸습니다.
전 스테퍼들을 보며 꿈 속에서 본 세 천재 아이들이 떠올랐습니다. 비록 천재 아이들이 가진 능력은 스테퍼에 비할 바가 못되나 그런 알수 없는 초월적인 존재 앞에서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행동 양식이 똑같았거든요.
다시 돌아와, 왜 인간은 스테퍼들을 관리하고 제한할까요? 근본적으로 영장류는 약한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강자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것은 당연한 생존의 법칙이지만, 기본적인 심리를 파고들면 답은 더 명확해집니다. 인간은 고릴라만큼의 완력을 갖추지 못했고, 코끼리만큼의 덩치를 갖추지 못했으며, 날지도 못하고 민첩하지도 못하며 번식력이 뛰어나지도 않죠. 아마 자연 속에서 인간은 언제 포식자에게 잡아먹힐지 모르는 공포 속에서 항상 살아야 했을 겁니다.
그래서 알수 없는 초월적인 힘이 나타나면 비겁하고 잔인해지죠. 생존을 위해서. 실제로 자신의 생존을 위해 야비함과 비열함을 숨기지 않는 사람들은 야생 속의 인간 그대로인 겁니다. 어찌 보면 호랑이 사자만 없을 뿐 인간의 사회는 자연 속 야생과 하나도 다를게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사람은 어렸을 적 누구나 자신만의 낭만을 가슴 속에 품죠. 하지만 스스로에 대한 책임을 질 나이가 되면 슬슬 그런 낭만은 마치 폐장된 놀이공원마냥 황폐해집니다. 레드핀즈 반장은 먼저 수사관 노릇을 하며 마주쳤던 인간들의 아귀다툼 속에 자신을 깊숙히 숨기죠. 그나마 영리한 사람이라 자신을 잃지 않으면서도 세상을 살아가는 법을 깨우쳤지만, 수사관으로서의 가면을 곧 노트릭에게 들키고 맙니다. 아니, 들키고 싶어했던 것일지도 모르죠.
저도 한때 이 세상엔 객관적인 진실이 존재한다고 믿고, 그 객관적인 진실이 곧 정의라고 생각했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거기서 더 나아가 정의란 하나의 사회 트렌드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 시대가 원하는, 그 시대의 결핍된 그 무언가를 채워주는 것이 바로 정의라고 생각했었죠. 노무현의 이상에 질린 사람들은 이명박을 선택했고, 이명박의 꼼수에 질린 사람들은 박근혜를 선택했듯이요.
하지만 이렇게 정의하는 것도 불완전하다고 생각이 들더군요. 트렌드란 무엇이죠? 과연 다수의 사람이 '트렌드'라고 납득할 수 있는 그 무언가가 존재하긴 하는 걸까요?
사실 이 의문에 대한 답은 어렵지 않습니다. 애초에 '다수'를 설정한 것 자체가 말이 안되는 논리죠. 그 어떤 논리도 우리 세계의 다수로서 대표한다고 말할 자격은 없으니까요. 그렇다면 범위를 좁혀서 나만의 정의를 정의하는 방법밖에 남지 않습니다. 노트릭의 정의는 무엇이었을까요? 레드핀즈의 정의는요?
레드핀즈가 내민 손은 사실 위로를 바라는 제스처였습니다. 그걸 간파한 노트릭은 쉽게 그 손을 잡아주지 않죠. 노트릭은 레드핀즈에게 말하죠. 이 안개가 자욱한 런던에서 살아가는데 굳이 가면을 쓸 필요는 없다, 세상에 자신을 굳이 끼워맞추지 않아도 된다, 레드핀즈는 그럴 능력은 충분하니 내가 그 의지와 용기를 주겠다고요.
아마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배우자로부터 듣고 싶은 말일 겁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행히도 자신이 배우자한테 그런 말을 해주지는 못하죠. 인간은 대체로 나약하니까요. 노트릭과 같이 세상의 부조리 속에서도 스스로를 지켜나갈 수 있는 의지와 용기, 능력이 절실하게 느껴집니다. 물론 노트릭도 레드핀즈의 존재가 큰 힘이 됐음은 말할 필요도 없겠죠.
이처럼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게임이었지만 마냥 진지하지만은 않은 게임이었습니다. 역전재판 패러디도 재밌었고, 애초에 캐릭터 디자인을 개그와 잘 접목시켜서 대사도 잘 짰고 추리 자체도 재밌었습니다. 역전재판 패러디는 더 있을 수도 있지만 제 기억에 남았던건 레드핀즈의 대사였습니다.
그리고 이 작품에서 설마 금태양을 등장시킬 줄은 상상도 못했네요 ㅋㅋㅋ
아무튼, 간만에 정말 재밌게 즐긴 게임이었습니다.
BGM이 솔직히 좀 유치하고 UI가 촌스럽다는 자잘한 단점이 있었지만 그 모든 걸 다 덮고도 남을 정도로 장점은 충분한 게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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