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이든 영화든 명작으로 불리기 위해서는 여러 조건들이 있습니다. 사람마다 작품마다 그 기준은 다르겠습니다만, 그 중 하나로 여러 번 봤을 때 느낄 수 있는 감동이 다르다는 것도 하나의 기준이 될 수 있겠죠.
게임은 영화에 비해 다회차 플레이 시 다른 감동을 주기 쉽습니다. 플레이어의 개입으로 인해 다른 분기점으로 이야기를 진행시킬 수 있다보니 제작자가 만든 이야기를 고정적으로 계속 진행시킬 수밖에 없는 영화에 비해 자유도가 높은 편이죠. 그래서 게임에 있어 다회차 플레이의 중요도가 꽤나 높은 편이기도 하죠.
하지만 모든 게임이 다회차 플레이로 인해 여러 분기점을 모두 가볼수 있다고 해서 극명한 차이의 감동을 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분기점이 갈리더라도 그 뿌리는 같기 때문이죠. 한 뿌리에서 나오는 스토리를 개연성을 살리는 선에서 아주 다른 감동을 주기란 언뜻 생각해봐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OMORI』는 명작이라고 불리기에 충분한 게임이었습니다. 여기에 더해 저는 이 게임을 단순히 게임을 넘어선 하나의 예술 작품이라고 불러도 될 것 같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의 스토리에서 다양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던 것과는 별개로도 시청각적 효과도 탁월했기 때문입니다.
독특한 느낌의 일러스트
이 게임은 일본계 미국인인 OMOCAT이 제작했습니다. 본인이 만화가이자 의류 디자이너인데, 그림 솜씨가 어떠한지는 알 수 없으나 만화에 대한 재능은 어느 정도 엿볼 수 있었습니다. 다음은 인게임 보스 중 하나인 '스위트하트'의 일러스트인데요, 기본적으로 인물 스케치나 컨셉은 일본 만화같은 느낌인데 채색이나 소품은 미국 카툰 쪽에 가깝죠. 이외에도 다른 등장인물을 보면 일본 만화 베이스에 서양의 감성을 살짝 얹은 듯한 느낌의 일러스트가 많습니다.
엄청난 컨텐츠 볼륨과 다양한 컨셉의 스테이지
기본적으로 『OMORI』의 세계관은 현실과 꿈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대부분의 플레이타임을 꿈에서 보내게 되는데요, 써니가 친누나를 죽였던 그 시점에서 모든 세계관이 멈춰 있습니다. 현실의 써니는 고등학생이지만, 꿈 속의 오모리는 아직도 12살의 초등학생인 것이죠. 오랜 기간동안 현실 도피처에서 지내다보니 그 도피처가 상당히 넓고 컨셉도 다양합니다.
우주, 해저, 숲, 사막.. 현실에서 볼 수 있는 지형물들은 거의 다 볼 수 있는 것 같네요. 놀라운 점은 이런 장치들이 다 현실에 실재하는 무언가와 상응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우주 전남친과 초반에서 필드에서 맞닥뜨리는 두더지 새싹들은 현실의 하비즈에서 파는 잡지에 실린 인물과 몬스터이고, NPC나 놀이터에 흩어져 있는 장난감들도 다 현실에 존재하는 물건들이죠.
이런 다양한 컨셉들과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BGM이겠죠. 모든 BGM이 괜찮았습니다만 특히 스위트하트 보스전 BGM은 스위트하트의 과한 자기애로 발현되는 광기를 정말 잘 표현한 것 같습니다. 이를 위해 일부러 유로비트라는 장르를 채용한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다양한 감동을 주는 루트들
이 게임에 정말 다양한 루트가 존재합니다. 분기점은 다른데 비슷한 엔딩이 존재하는 것으로 봐서 '게임'적 특성으로서의 분기점보다는 '스토리'적 요소를 더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플레이어로 하여금 개입하게 만들어서 다른 스토리를 즐길 수 있게 하는 것은 게임만이 가지고 있는 특성인데, 이 게임은 그 특성을 정말 극한까지 활용했습니다.
저는 첫 번째로 이사 엔딩을 봤는데, 초회 플레이 때는 써니에 대한 배신감이 가장 크게 느껴졌습니다. 거의 20시간 가까이 각 캐릭터 간에 쌓아온 추억들을 밀도 있게 접하면서 어느새 저도 그 사이에 있는 인물인 것마냥 이입하게 됐죠. 그런데 그렇게 의지하고 사랑하는 친누나를 내가 죽였고, 바질과 같이 자살로 위장하다니... 솔직히 대충 스토리를 짐작했습니다만 짐작하고 있었어도 감정의 전복이 너무 심해 충격이 완화되지는 않았죠.
그래서 누나를 죽인 것도 모자라 친구와 공모해서 자살로 위장했으면서 4년간 도피만 하면서 살아온 써니에 대한 분노와 배신감이 엄청 크게 느껴진 것입니다. 그러면서 애인을 잃은 히로에 대한 연민과 동생에게 죽은 마리에게 동정심을 크게 느꼈습니다.
두 번째 플레이에서 자살 엔딩과 굿엔딩을 같이 봤는데, 자살 엔딩은 그야말로 진정한 불행이 무엇인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루트였습니다. 게다가 같은 사건에 대해 각자가 받아들이는 의미도 다릅니다. 써니 입장에선 실수로 자기 누나를 죽인 것에 대한 죄책감과 그 진상을 유일하게 공유하던 친구의 자살로 인한 고립무원(孤立無援)의 감정을 느꼈겠죠. 오브리 입장에선 자신의 괴롭힘으로 인해 친구가 자살했다고 생각했을테니 그에 대한 죄책감과 트라우마를 피해다니기만 했던 자신에 대한 원망을 느꼈을 테고요. 히로는 사랑하던 애인과 사별했고, 켈은 가장 친하던 친구 둘이 자살했죠.
마치 옛날 영화 『올드보이』에서 느꼈던 카타르시스의 조건을 보는 듯 했습니다. 『올드보이』에서 우리가 느꼈던 충격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① 우리와 비슷한 평범한 사람이 ② 악의 없이 저지른 사소한 과오가 ③ 엄청난 불행을 불러일으켜서였을 겁니다.
『OMORI』에서 느낄 수 있는 카타르시스는 『올드보이』에서 느꼈던 것보다 훨씬 더 강렬할 겁니다. 『올드보이』는 흔히 접하기 어려운 근친상간을 다루는 작품인데 반해 『OMORI』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형제애를 다루고 있기 때문일 테지요. 게다가 『OMORI』의 '악의'가 『올드보이』의 '악의'보다 훨씬 약합니다. 어렸을 적에 남매간의 말다툼과 몸싸움, 누구나 해볼법한 경험이잖아요? 다만 하필 그날 마리는 무릎이 안좋았고, 하필 높은 계단 위여서 벌어진 극단적인 사고일 뿐...
게다가 불행이 거기서 그치지 않고 죄책감에 시달리던 바질마저 자살까지 이르게 만들고 말죠. 가장 친한 무리의 친구가 두 명씩이나 자살하는 상황... 저는 그런 경험까지는 없어서 그 불행의 크기가 어떠할지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네요.
이 엄청난 충격을 상회하는 감동을 바로 굿 엔딩에서 줍니다. 간단히 말해 써니가 과거의 트라우마를 딛고 일어서서 친구들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걸로 마무리가 되는데요, 이 간단한 한 줄 안에 깊은 연출이 꽉꽉 들어차있습니다. 나머지는 다음 포스트에서 상세하게 얘기하는 것이 좋을듯 합니다. 너무나 많은 얘깃 거리 때문에 글이 늘어질 수도 있을 것 같더군요.
마무리..
사실 이 게임에서 인상깊었던 부분을 하나하나 열거하기는 어렵습니다. 너무나 많은 곳에서 인상 깊었고 여운도 엄청나게 깊게 남았거든요. 써니가 자신의 죄를 친구에게 고백하는 장면도 연기해보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마저 다양한 느낌으로 가능하겠더라고요. 그만큼 느낀 것도 많았고 생각할 만한 거리도 많았던 게임이었습니다. 『그녀의 세계』 이후로 이 만큼의 감동을 주는 게임이 또 있을까 싶었는데, 그 감동을 훨씬 상회하는 게임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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