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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효시(嚆矢) - 『쓰르라미 울 적에』

by 그녀의세계 2023. 5. 10.

[쓰르라미 울 적에]는 문제편, 해결편 각각 4편씩 총 8편의 시나리오로 이루어져있다. 전부 다 감상한 것은 아니고, 아직 2편 와타나가시, 3편 타타리고로시까지 본 상태다. 비록 전체의 이야기를 다 감상한 것은 아니지만 강렬한 인상을 받았고, 꽤 풀어낼 만한 이야기가 있어서 우선 글을 써본다. 추후 더 쓸만한 내용이 있으면 추가할 예정.

보통 사람은 살아가면서 수많은 상처를 받고 치유하면서 살아간다. 그래서 가끔 나는 인생이란, 한 폭의 도화지에 자기 맘대로 그려나가는 그림이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자기 마음대로 그린다고 해서 정말 온전히, 완전한 랜덤으로 그려진다는 뜻은 아니다. 완전한 자유가 허상인 것과 같은 맥락으로 우리가 도화지에 붓질을 할때 꼭 누군가한테는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아무리 자유로운 영혼이라 하더라도. 아무리 뛰어나고, 아무리 전위적인 예술가라 하여도 본인 시대를 몇백년 앞서갈 수는 없다.

사람의 인격 형성에 가장 크게 미치는 요인은 누가 뭐래도 가정이다. 하지만 그 가정조차 사회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보통의 사람은 사회의 영향을 받지 않고 자랄 수는 없는 것이다. 2편의 와타나가시나, 3편의 타타리고로시에서 다루는 감정도 다 가정 안에서 이뤄진다. 이런거 보면 내가 나중에 가정을 꾸렸을 때 내 자식(만약 낳는다면)에게 최대한 좋은 영향을 주도록 하나하나 조심해야 할 것 같다는 느낌을 계속 받는다. 물론 나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닌만큼 내 배우자 되는 사람도 그만큼 중요하겠지만.

----- 1월 22일 -----

뭐 이제야 문제편을 전부 봤을 뿐이지만, 문제편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2편, 3편이었다. 1편은... 자극적이긴 했지만 영감을 주지는 못했고, 4편은 쉬어가는 느낌이라 딱히 인상 깊지는 않았다. 2편의 주제는 질투, 3편의 주제는 사랑이라고 난 생각한다. 2편부터 얘기해볼까...

나는 살면서 누구 하나와 생존을 건 암투를 해본 적이 없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생존을 위해 치열하게 살아본 적도 없다. 그래서 광해군과 같이 어렸을 때부터 생존을 위한 숨막히는 삶에 대해 나는 공감하지 못한다. 뭐, 애초에 공감이라는 말 자체가 허상이긴 하지만. 말이 그렇다는 거다. 하지만 타인의 이야기를 통해 그 삶이 얼마나 치열하고 불행한 삶인지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그런 삶은 가족이 없다. 아버지? 형제? 본능적으로 안정적인 사랑을 받아야할 대상은 언제든 내 목을 베어버릴 수 있는 적일 뿐이다. 물론 「와타나가시」 편에서는 그렇게 숨막히는 투쟁이 그려지진 않는다. 차기 당주로서 자기 자신을 숨겨야만 했고, 자기보다 서열상 아래지만 은근슬쩍 위협하는 동생 때문에 여자로서의 마음도 쉽게 드러내지 못하는 모습으로 그 뒤의 수많은 에피소드를 짐작할 뿐.

아마 어렸을 때부터 끊임없이 주위로부터 옥죄어 왔을 것이다. 초등학교 입학하기도 전의 나이부터 당주로서의 제왕 수업을 받고 자랐기에 성장하면서 또래와 괴리, 자기 어깨에 지워진 무게는 견디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만의 정체성을 마음껏 누리는 것은 상상도 못하는 삶. 또래와는 확연히 느껴지는 괴리. 하나의 인간이 가족으로부터의 사랑, 또래와의 우정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삶. 그런 와중에 엄동설한에 작은 모닥불을 소중히 지키듯, 마음 속으로 키워오던 한 소년에 대한 사랑은, 분명 괴로운 것이었을 터다. 쉽게 드러낼 수 없는 마음이지만, 그 누구보다도 먼저 알아줬으면 하는, 그런 마음. 하지만 표현을 망설이는 사이 두려워하던 동생이 그 소년을 빼앗아가려 하고, 그 소년이 다른 소녀에게 인형을 주는 장면은 트리거를 당기기 충분했다.

그 뒤로는 뭐... 폭주다. 권력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잔혹해지는 왕가의 흔한 에피소드다. 일반인이 보기에는 과해 보이는 잔혹성은 생존의 극한 상황까지 몰린 한 인간이 그 두려움을 얼마나 크게 증폭시켜 표현할 수 있는가를 보여줄 뿐이다.

...내 삶이 아닌 것에 감사할 따름

-----1월 24일-----

해결편 메아카시를 전부 봤다. 이로써 바로 앞에서 쓴 미온과 시온에 관련된 에피소드들은 전제부터가 틀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사람만 바뀌었을 뿐 표현하고자 했던 감정은 다르지 않다.

얼마 전, 아빠가 나중에 뭘 해보고 싶냐는 질문에 나는 글을 써보고 싶다고 했다. 나만의 세계를 창조해서 내가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는 것. 얼마나 두근두근거리는 일인가. 어떤 형식이던간에 좋다. 단순한 글을 늘여 쓰는 형식이어도 좋고, 오페라 형식을 글로 표현해도 좋고, 교향곡처럼 악장 형식으로 표현해도 재미있을 것 같다. 물론 이렇게 글을 쓰면 출판할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뭐 어때. 내가 만족하면 그만인데. 악몽, 교향곡 등 음악에서도, 건축에서도... 영감을 느낄 수 있는 소재는 무한히 많다.

나에 대한 여러 정황들을 고려해봤을 때, 나는 가족애에 대한 결핍이 가장 큰 것 같다. 솔직히 이건 여러 정황으로부터 추측할 뿐, 나에게 직접적으로 물어볼 수는 없다. 왜냐고? 직접적 추론이 가능한 근거들은 이미 기억 너머 저편에 안치되었으니까. 그 기억의 주인인 나조차도 검색해볼 수 없다. 한때는 저 너머에 잠들어 있는 무의식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인 최면에 흥미를 느꼈으나, 왜인지 흥미 정도만 느꼈을 뿐 깊은 관심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여태까지 본 쓰르라미 울 적에의 모든 에피소드가 다 재미있었지만, 그래도 가장 인상 깊게 남았던 것은 타타리고로시다. 타타리고로시는 신의 징벌이라는 뜻이다. 결말부터 말하자면 가족처럼 아끼던 여자애가 숙부에게 학대받고 있었고, 더이상 고통받지 않게 하기 위해 자신이 직접 숙부에게 신벌을 가하는 내용이다. 케이이치가 흑화해서 살인을 저지르는 부분은 현실에 대입해서 생각해보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얘기다. 지금 나한테 살인을 저지르라고 말한다면? 난 그래도 잃을게 많은 사람이기에 도저히 저지르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케이이치에게 이입을 할 수 있는 것은, 사토코와의 관계 때문일 것이다.

작중에서 케이이치는 연애 감정과는 다르다고 선을 그었지만, 내 생각에는 가족애와 연애 감정이 반쯤 섞여 있는 그런 감정이었던 것 같다. 사토코는 친오빠는 아니지만 친오빠 만큼의 사랑과 편안함을 주는 케이이치에게 사랑을 느꼈고, 케이이치 또한 어리광 부리는 여동생과 이것저것 챙겨주는 애인의 느낌을 동시에 받았을 것이다. 특히 사토코가 케이이치에게 저녁을 만들어주고 같이 식사를 하는 장면에서 그 감정은 최고조에 달했고, 나는 여기서 가장 따뜻한 행복을 느꼈다. 따뜻하다는 말로도 부족한, 가장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차오르는 행복. 혹은, 어린아이가 엄마의 미소를 태양빛 삼아 따뜻한 품 안에 잠들어갈때의 그 행복.

살면서 난 이런 따스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을까. 이런 생각하면 자연스레 연애할 때 생각부터 하는게... 뭔가 아직 나라는 사람이 덜 여물었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도 든다.

-----2월 3일-----

현재 Ch.7 미나고로시편까지 본 상황. 꽤나 오랜만에 리뷰를 쓰는듯 한데.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꼭 주인공들이 나를 보는 것 같아서 말이다. 자신의 친오빠를 투영하면서 사랑을 느끼는 사토코나, 자기가 짊어진 짐을 체념한 채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하지 않고 혼자 묵히는 리카처럼. 이런 고민을 한 것도 백 번은 넘게 했을 것이다. 여기에서 구구절절 더 얘기해봤자 괜히 기분만 더 가라앉을 뿐일 테지.

미나고로시편에서 모두의 염원이 모여 어려움에 처한 사토코를 극적으로 구출하는데 성공하지만, 결국에 리카의 죽음을 막지 못하고, 그 배후에 훨씬 더 큰 음모가 있음을 보여준다. 그 당시에 있을 법한 이야기라고 생각하면서도 뭔가 전형적인 음모론같아서 솔직히 김샜다. 하지만 그런 불합리한 상황에 맞서는 아이들의 모습은 ... 나에게 경종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설 연휴 기간 동안 죽은 사람처럼 살았다. 방 안에서 나가지 않고, 하루 종일 갇혀 있는 것처럼 살았다. 안 그러려고 마음 먹어도, 조금만 마음의 고삐를 늦추면 이런 상태가 된다. 그러면 별 것 아닌 일에도 괜히 우울해지고, 감상적이게 된다.

운명이라... 솔직히 난 별로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은 없다. 운명이란 것을 믿지도 않지만, 운명이란 것은 어차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무수히 많은 요인들의 영향을 받아 확률적으로 결정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이런 생각은 내가 적극적으로 내 인생을 개척해 나가기 싫어서, 귀찮아서 그런 비겁한 변명이었는지도 모른다. 두렵나? 두렵다고도 말할 수 있다. 싫다? 싫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이든지 간에 계속 이렇게 살아서는 내가 언젠가 마음 속에 그리던 그 미래의 모습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눈 가리고 아웅인데. 지금 아무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내가 미래에 바라는 내 모습이 오리라고 상상했을까. 작중에서 나오는 내용은 훨씬 스케일이 크다. 친한 친구들끼리 행복하게 지내면서 살기 위한 타임 루프물이다.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하고 비슷한 내용이다. 어떤 특정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해 십만 번 이상 같은 내용을 되풀이하는. 쓰르라미 울 적에는 6월 한달도 안되는 시간을 다 합쳐 100년을 반복한다. 그런데도 그 운명을 깨지 못하는 것은 그만큼 알을 깨는 것이 어렵다는 방증이겠지.

그래도... 힘내자.

-----2월 8일-----

드디어 이 길고 길었던 쓰르라미 울 적에 작품 감상이 전부 끝났다. 이 작품은 확실히 쉽다.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게 써야 하니 당연한 말이겠지만,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는 명확하다. 죄를 미워하되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아마 작가는 일본 사람이고, 종교적인 사상이 크게 부각되는 것을 꺼렸기에 직접적인 언급은 꺼렸지만 작품을 끝까지 감상한 입장에서는 너무나도 명확하다. 너무나 노골적으로 '사람'과 '죄'를 히나미자와 증후군이라는 소재로 분리해서 끝까지 사람, 심지어 가장 악인으로 그려지는 타카노조차 저마다의 사정이 있음을 그린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소시오패스와 싸이코패스를 잘 구분하지 못하는 것 같다. 싸이코패스는 상식 자체가 일반 사람과는 다르다. 그래서 극한의 감정을 일으키는 트리거가 일반 사람과는 다르기에, 보통 사람이 보기에는 감정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반면 소시오패스는 다르다. 일반 사람과 별로 다르지 않고, 굉장히 똑똑하며 공과 사의 구분이 철저하고 일을 잘한다. 그래서 얼핏 보기에는 저 사람이 소시오패스인지 잘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다른 사람과의 공감도 가능하다. 다만, 자기의 의지가 너무 중요해서 다른 사람과에게 영향을 받는 것을 매우 싫어한다. 항상 타인을 조종해야 하고, 그 반대는 끔찍하게 싫어하고... 이런 특징만 나열하면 주위에 이런 사람이 한 명쯤은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맞다. 싸이코패스는 실제로 겪을 일이 거의 없지만, 소시오패스는 살면서 마주칠 가능성이 꽤 많다. 예전에 『배려』라는 소설에서 주인공이 정도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개인적인 느낌으로는 정말 일본 창작물 답게, 인물의 특성과 감정선, 그리고 전체적인 줄거리를 정말 잘 엮었다고 생각한다. 총 8개의 스토리를 각 인물의 떡밥을 던지면서 의문을 제기하고 그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는 방식, 그리고 시간 루프물이라는 소재로 각 에피소드를 엮어서 모두의 힘을 합쳐 해답을 만들어내는 과정은 정말 감탄이 나왔다. 세련됐다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었지만, 인물의 특성과 이야기의 소재를 이리저리 짜맞춰서 전개하는 솜씨는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아닌 죄를 미워하라고, 그 모든 죄를 끌어안고 스스로가 희생양이 되는 스토리는 작가가 독실한 크리스천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작중에서 하뉴가 모든 죄를 사하고 스스로 와타나가시의 희생양이 되는 장면은 예수를 떠올리기 충분하다.

위에서 말했듯이 상당히 고전적인 소재임에도 감명깊게 본 것은 아무래도 스토리텔링일 것이다. 각자 힘든 사정이 있었던 인물들이 모두와의 유대를 통해 상처를 극복하고 운명에 맞서 싸워 승리한다는 내용은 치트키다. 다만 여기서 중간중간 스토리의 선을 넘어선 장면도 군데군데 보이긴 했다. 마지막에 미온이 오토노기와 격투를 벌여 승리한다는 내용이나 타카노가 쏜 탄환을 리카가 막아내는 내용이라던가... 뒤에 이 작가에 대한 비판을 좀 읽어보니 대략 시나리오 좀 쓰다가 본인이 주체할 수 없는 그 무언가가 있는 모양이다. 그런걸 너무 남발하면 작품을 해치지만 그런게 전혀 없으면 작품이 만들어지지도 않으니 뭐...

죄를 미워하되 인간을 미워하지 말라... 좋은 말이지만 결국 현실적이지는 않다. 이것은 인간의 역량의 한계라고나 할까. 원래 그런 말이 있다. 고도로 사회화된 동물이 무리를 이뤄서 살 수 있는 최대 마릿수가 있다. 각 개체 간의 커뮤니케이션 능력과 종의 특성에 따른 한계인 것이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원래 인간도 무리를 이뤄서 살 수 있는 개체 수도 지금과 같이 많지는 않았다. 이것을 증폭시킨 것은 첫 번째, 고도로 발달한 언어와 두 번째, 무리를 결속시킬 공통의 허상이다. 언어는 각 개체 간의 정교한 의사 소통이 가능하게 한다. 두 번째가 종교, 화폐와 같이 실제로는 별 의미가 없지만 모두가 그것을 가치있도록 믿게 만드는 것이다. 종교의 힘은 예로부터 다수 사람의 의지를 하나로 모으는데 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사람의 능력은 한계가 있다. 아무리 고도화된 언어를 가지고 있어도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깊게 이해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닌가보다. 이는 인간의 능력은 한계가 있고, 불을 사용하고 언어를 발전시키는 과정은 주어진 하드웨어를 최대한으로 사용하려는 과정일 뿐, 그릇을 키우는 과정은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타인의 사정을 흘려 듣게 일쑤다. 그래서 일면 악인같은 면모를 보이면, 그 사람이 악일 거라고 쉽게 생각한다. 이렇게 쓰면 비판적인 논조처럼 보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현실적으로 사람이 신경을 쓸 수 있는 에너지는 총량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타인에 대해 신경을 쓰면 쓸수록 다른 곳에 쓸 수 있는 에너지를 버려야만 한다. 이것은 기회비용 혹은 가치관의 문제로, 결코 사람을 탓할 문제가 아니다.

소설같은 곳에서야 인물들의 깊은 내면이 나와도 결국에 그것은 허상에 불과한 것이기에 책을 덮고 나면 언제든 그 소설 속 인물과는 전혀 상관없는 현실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에 굳이 신경쓸 필요는 없다. 하지만 현실 속 인물은 그렇지 않고, 더욱이 소설처럼 자기의 이야기를 객관적으로 잘 전달할 수도 없다. 결국 사람은 자신을 타인에게 제대로 전달할 수도, 제대로 전달 받을 수도 없는 존재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사람을 수용하는 자세가 제일 적당하다고 생각한다. 제일 어려운 경지라고는 생각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