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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좌절(挫折) - 『Tchaikovsky Symphony No.6』

by 그녀의세계 2023. 5. 10.

시작부터 이토록 우울한 음악이 있을까. 베이스의 E, C 화음 위에 얹혀지는 바순의 긴 솔로는 어두컴컴한 방 한가운데 앉아서 고뇌하는 차이코프스키가 연상된다. 마치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하기 위해 어두운 표정으로 무대 위에 등장하는 배우같다. 그 뒤로는 슬프지만 아직은 비교적 담담한 목소리로 자신의 얘기를 시작한다. 이 악장의 백미는 현악기의 주도로 시작하는 메인 멜로디다. 이 메인 멜로디는 애수, 슬픔, 고뇌, 후회 등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부정적이지만 아름다운 감정을 함축시킨 듯하다. 개인적으로는 2번째 등장하는 메인 테마를 가장 좋아하는데, 베이스와 금관 악기, 그리고 팀파니의 반주가 훨씬 더 극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갑자기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듯한 극적인 감정 변화를 보여주는데, 1악장의 두 번째 주제는 거의 일관되게 분노, 절규를 담고 있다. 그 절정을 트럼본이 맡는데, 현악의 격렬한 반주를 뚫고 가라앉고 격렬해지는 감정을 표현한다. 그 뒤로는 1악장의 이야기를 정리하고 마무리하는 감정을 보여주는데, 이 멜로디를 트럼펫이 담당하는 것이 인상깊었다. 트럼펫이 낼 수 있는 특유의(목관은 낼 수 없는) 가벼운 애절함을 잘 표현한 것 같다.

2악장은 1악장의 분위기와는 너무나 상반되는 우아한 멜로디로 시작한다. 하지만 1악장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탓일까. 그 우아함마저 뭔가 슬픔이 묻어있는 것 같다. 마치 비극의 주인공이 한때는 나도 아름답고 절대 잊어버리고 싶지 않은 추억이 있었지... 하면서 회상하는 듯 하다.

3악장은 전형적인 행진곡 풍의 곡이다. 그래도 슬픔의 잔재가 남아있던 2악장과는 달리 시종일관 쾌활한 분위기다. 개인적으로는 화자 본인의 잘 나가던 시절을 그린게 아닐까 싶다.

하지만 피날레는 매우 무겁고 느리게 시작한다. 마치 잘 나가던 시절의 끝에 결국은 벽에 부딪히는 현실을 뜻하는 것일까? 여담이지만 메인 멜로디를 퍼스트 바이올린과 세컨 바이올린이 한 음씩 번갈아가면서 연주하는 특이한 형식을 취하는데, 당시 오케스트라 악기 배치는 지휘자의 양 옆에 퍼스트, 세컨 바이올린이 배치되는 형식이어서 양 옆에서 메인 멜로디가 번갈아가며 들리게 하기 위한 장치라고 한다. 하지만 요즘에는 이게 꼭 지켜지지는 않는 것 같다.

어쨌든 피날레의 서주 부분이 끝나고 나면 폭풍의 전주가 시작된다. 상승하는 스케일과 점점 고조되는 분위기를 연출하는데, 금관이 그 가속을 부추긴다. 한 옥타브가 올라간 이후로 더이상 그것은 잔잔하지 않게 된다. 그 절정은 4옥타브 C 음에 도달하고, 천천히 올라갔던 감정선은 한순간에 확 무너져내린다. 그리고 고통의 순간에서 벗어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 이어진다. 어느 정도 분위기가 가라앉고 서주의 변주가 연주되고, 비슷한 감정선이 찾아왔을 때 이제는 고조되는 속도가 더 빨라지고, 훨씬 더 격렬하게 휘몰아친다. 모든 움직임을 멈춘 뒤의 트럼본의 연주는 이젠 미동조차 남아있지 않은 채 늪으로 가라앉는다.

마지막 현악기로만 구성된 하강 스케일은 인간이 밑바닥부터 무너지는 과정을 보여주는듯 하다. 처음엔 현악기 모두가 참여했지만 끝에 가서는 첼로 베이스밖에 남지 않는데, 인간의 기력이 소멸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고, 인생이란 무대에서 스스로 소리없이 퇴장하는 주역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때문에 앞의 이야기에서 수많은 고뇌, 슬픔, 절규를 이야기했지만 차이코프스키 6번에서 가장 슬픈 부분은 마지막의 하강 스케일이 아닌가 싶다. 바흐가 Chaconne에서 완전히 무(無)로 돌아가는 슬픔을 이야기했듯이, 차이코프스키는 한 개인이 살아갈 원동력을 잃어버리고, 그 고난을 이겨내려는 의지마저 꺾이고 스스로 소멸해가는 과정을 이야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