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저마다의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상처를 받지 않는 사람이란 있을 수 없고, 상처를 주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란 있을 수 없다. 사람은 저마다의 고유한 세계를 가지고 살아가며, 다른 사람과 부대끼고 살아가기 위해서 성숙한 방어기제를 갖추기 전까지는 많은 상처를 주고받으면서 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성숙한 방어기제를 갖췄다고 해서 상처를 안주고 살아갈 수도 있는 것도 아니지만.
사람마다 지니고 살아가는 상처의 크기도 각양각색이다. 어떤 사람은 성숙한 부모 밑에서 어렸을 때부터 높은 자존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어떤 사람은 학대하는 부모 밑에서 자아를 거의 형성하지도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도 존재한다. 그래서 누군가는 사람에 너무 의존하거나, 사람을 지나치게 믿지 못하며 살아간다.
현아는 안타깝게도 평범한 사랑을 받으면서 자란 인물은 아니다. 비교적 정상적인 가정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지만, 사이비 종교와 불의의 사고가 터진 덕에 엄마는 사이비 종교에 완전히 빠져들고 그 전에 받았던 정상적인 사랑은 더이상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부모님도 없고 의지할 인간관계 하나 없던 현아에게 유일한 사람은 방황하며 나온 병원 앞 횡단보도에서 만난 남자아이 뿐이었다.
여기서부터는 판타지적 요소가 들어가지만, 현아는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이쪽 세계'로 아주 긴 세월동안 도피하게 된다. '이쪽 세계'는 크나큰 마음의 상처를 가진 사람들이 일종의 도피처로 삼는 곳이고, 현아는 희망 한 불씨를 생명샘으로 삼아 그 도피처에서 긴 세월을 보내게 된다.
사실 재미있던 부분은 현아와 '나'의 구도다. 얼핏 보면 '나'로 인해 현아가 과거의 트라우마로부터 벗어나는 이야기지만, 스토리 중간부터 현아'들'과의 관계를 통해 '나'도 상처를 치유받는다. '나'는 기본적으로 사람에게 헌신하는 스타일. 꽤 오랫동안 자신의 그런 성향을 이용하는 전여친 때문에 상처를 많이 받는다. 반면 현아는 자신의 의견을 제대로 피력하지 못하고 빙빙 돌려 말하는 스타일인데, 서로 간의 애정을 통해 현아는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드러내는 방법을 조금씩 익히게 되고, '나'는 자신의 헌신하는 성격이 제대로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와닿을 수 있음을 알게 되어 자신의 힘든 부분을 어느 정도 털어놓을 수 있게 된다.
물론 현아가 가지고 있던 상처의 크기가 워낙 컸기 때문에 얀데레같은 성향을 드러내보일 때도 있었다. 여기서 솔직히 웬만한 남자는 다 떨어져 나갔을 거라고 생각은 하는데, '나'는 자기가 좋아하는 그 무언가에 대해서는 물불을 안가리는 성격이라 합이 맞아떨어진 것 같다. 그래서 현아가 광기어린 눈을 좋아한다고 했던 것이 아닐까.
사실 난 유리와 현아, 우비가 동일 인물이라는 것을 거의 후반에 가서야 알았다. 유리가 컬러렌즈를 꼈고, 원래 눈의 색깔이 현아와 같은 색깔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그 때 우비와의 눈 색깔도 비교해보니 전부 같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우비가 현아와의 관계에 대해 얘기할 때 본 적이 없다고 했지 모르는 사람이라고 얘기하진 않았다. 현아가 자신의 미래 모습임은 얼핏 알 수는 있어도 실제로 만날 수는 없으니까.
작품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마치 옛날 네이버 웹툰 N의 등대를 떠올리게 한다. 이 세계의 존재 이유조차 모르고 암울하고 음습한 분위기에 영문 모른채 이 세계에 던져진 주인공들. 그리고 '눈'의 존재. 물론 N의 등대에서의 등대와 그녀의 세계에서 눈의 존재 의미는 확연히 다르다. '눈'은 트라우마를 건드리지 않으려는 현아의 자기방어기제다. 사실 트라우마 그 자체가 사람으로 하여금 상처를 받았던 그 순간의 시점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든다. 침몰 사고를 겪은 사람한테는 그 침몰 당시의 플래시백을 지속적으로 겪게 하며, 폭력에 시달리는 사람에게는 가해자가 없음에도 그 폭력이 언제나 곁에 있는 것마냥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랬기에 그 눈은 매일 자정마다 상처를 받았던 그 시점으로 자신의 세계를 되돌리는 역할을 하고, 트라우마의 당사자인 현아가 그 세계에서 안주하게끔 하는 역할을 한다.
마지막에 이쪽 세계에서 탈출해 현실 세계로 넘어가는 도중에 공중에서 하강하는 장면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마녀 유바바의 저주에서 벗어나 자신의 원래 이름을 되찾은 센과 하쿠가 서로 손을 맞잡으며 하강하는 장면을 떠오르게 한다. 생각해보면 지브리 애니메이션 중에서 이런 공중에서 하강하는 장면이 종종 활용되는데, 이런 장면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
하룻동안 계속 생각해봤는데, 여기에 대해 확실하게 정답이다 싶은 해답을 찾지는 못했다. 그저 어떤 신적인 존재가 천상의 세계(하늘)에서 인간의 세계(땅)에 강림하듯이, 한편으론 디즈니 감성같은 느낌으로 깨달음을 노래하다 마무리하는 느낌으로 땅에 안착하는 듯한? 어렴풋한 느낌은 알겠지만 뭔가 확실한 나만의 정답을 아직은 못 찾겠다.
그렇다면 우비가 말하던 '이쪽 세계'에서 탈출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파편은 무엇이었을까? 시나리오 내에서는 꽤 중요한 느낌으로 언급했지만 정작 그 중요한 파편이 무엇이었는지는 명확하게 언급해주지 않았다. 사실 여기에 대한 답은 비교적 간단하게 유추할 수 있다. 좁은 의미로는 '나'가 어렸을 적 스쳐 지나갔던 작은 인연의 기억이겠지만, 좀더 넓게 해석하자면 그 사람의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진정한 의미의 사랑이 아닐까 싶다. 생각해보니 이 사실을 대놓고 알려주기에도 뭔가 어색하긴 하다.
사실 나는 현아와 '나'가 알콩달콩 하는 모습이 귀여워서 몰입은 했지만 내내 현아를 계속 의심하고 있었다. 불여우라고, 뭔가 결정적 순간이 되면 '나'를 이용해먹고 버릴 것 같다고. 하지만 그것은 내 지나친 비관이었고, '나'에 대한 사랑이 워낙 간절한 탓에 온갖 망상을 했을 뿐이다.
어쩌면 내 지나친 비약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나도 어쩌면 현아와 비슷한 마음가짐으로 사람을 대하는 것 같다. 어떤 운명과도 같은 사랑을 간절히 기다리면서 동시에 사람을 못믿기도 하고. 그래서 어쩌다 내 마음에 들어온 사람에게 꽤나 집착하는 스타일. 물론 '나'와 같은 헌신적인 사람을 만나면 나도 어느 정도 만족하고 살아갈 수 있겠지만, 이것은 게임이니까 가능한 스토리고, 실제로 이런 사람을 만나기엔 쉽지 않다.
어쨌거나 꽤나 위로를 받았다. 지금 상황이 행복하게 지내기엔 그다지 좋지 않은 상황이지만, 현아가 아주 오랫동안 품고 있었던 너무나도 커다란 외로움이 언젠가 채워질 거라는 희망을 줬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게임이다보니 결말에선 아주 좋은 쪽의 얘기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뭐 어때. 인생이란게 그런 짧은 좋은 순간을 위해 살아가는 것인걸.
덤으로, 게임을 하면서 이런 게임을 만들어줘서 고맙다는 감정을 느낀 것은 처음이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고 자주 하는 게임인 로스트아크를 할 때도 이런 감정을 느껴보진 못했는데.. 내가 해본 국산 게임 중에 이 정도의 깊은 주제와 이 정도의 완성도 높은 스토리, 연출을 보여준 작품은 아직까지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바람으로는 이 작품이 더 많이 알려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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