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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설

Trauma - 재조명되는 밀양 사건을 보면서

by 그녀의세계 2024. 6. 8.

요즘 20년 전에 발생했던 밀양 그 사건이 다시 재조명되고 있다. 가해자의 신상을 폭로하는 식으로 사적 제재가 이뤄지고 있으며, 그 와중에 무고한 사람이 오해를 사거나 정보의 불명확한 부분도 드러나 혼란이 가중되는 양상이다.

 

난 이 세태를 보고 바로 웹툰 『비질란테』가 떠올랐다. 하지만 현실은 웹툰보다 참혹하다. 비질란테의 주인공 김지용은 자신만의 철저한 규칙이 있으며, 똑똑하고 잘생긴 경찰대 엘리트다. 더욱이 그를 보좌해주는 최고의 사이드킥 조강옥도 있다. 하지만 현실에선 잔인한 하이애나의 탈을 쓴 유튜버 렉카들이 그저 관심을 모으기 위해 콘텐츠로서 소비하는 느낌이다. 최악인 것은 렉카질을 해도 멍청하게 한다는 것이다. 적어도 유사 언론의 역할을 할거면 프로파간다라도 제대로 세우면 모르겠는데, 지금까지는 그냥 어중이 떠중이같은 느낌.

 

이렇게 말하기엔 피해자 분에게 굉장히 송구스럽고 오만한 말이지만, 나도 유사도는 굉장히 낮지만 비슷한 일을 겪은 적이 있다. 그리고 사귀었던 애인들 중 유사한 경험을 겪었던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성폭력이 어떻게 인격을 파괴하는지, 왜 살인보다도 더 사악하고 악랄한 범죄인지 대강은 안다. 

 

살인은 육신을 파괴하는 행위다. 강간은 인격을 파괴하는 행위다. 특히나 강간에 따른 고통은 그 순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내가 그 일을 당했을 때 나를 공감하며 위로해주는 사람도 있었지만, 걔가 그랬다고? 음.. 이거 양쪽 입장을 다 들어봐야 하는거 아냐? 심지어 내 가장 절친한 친구들조차 그 가해자랑 관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 가해자는 내가 아는 사람만 해도 5명에게 그런 짓을 저질렀는데. 그 가해자는 내가 속해있던 동아리뿐만 아니라 과에서도 그짓을 하고 다녔는데 말이다.

 

그 형에 대한 이미지는 매우 좋은 편이었다. 악기도 잘 다루고, 상식이 정말 풍부하고 놀기도 잘하고 똑똑한 사람이었다. 내가 뭔가를 배울 수 있는 사람이라고 인정한 몇 안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 일을 당하기 전까지는.

 

난 내 절친과 그 형과 셋이서 형의 자취방에서 같이 술을 마셨는데, 텐션 높던 그 형을 따라 나도 거의 만취했고... 그 일이 일어났다. 왜 술에 취하면 상대방이 무슨 짓을 하던 저항하기 힘든지 그 때 알았다. 첫 번째,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이 무슨 일인지 파악이 잘 안된다. 두 번째, 파악이 돼도 몸이 말을 듣지 않으며 취기에 따른 졸음을 이기기 쉽지 않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건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잘 이해가 안될 것이다. 나 역시 겪기 전엔 이해가 안됐으니까.

 

그래도 나는 양호한 편이었다. 사건 이후 원하면 소송을 도와주겠다는 선배들도 있었고, 가해자를 동아리에서 퇴출하는데 앞장섰으며, 가해자는 의외로 자기가 한 짓을 순순히 인정했다. 그래서 무리 없이 일상을 살 수 있는 거겠지. 물론 인사 불성이 될 때까지 술을 마시는 일은 없지만..

 

보통 이런 끔찍한 일을 겪은 피해자가 2차 피해를 받는 상황은 매우 다양하다. 1차 피해가 그 순간이라면 2차 피해는 지인, 가족들한테 받는 피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렵게 피해 사실을 털어놨을 때 어떻게 대처할지 잘 모른다. 나보다 20~30년을 더 산 부모라도 말이다. 대개는 내 자식이 그런 끔찍한 일을 당했다는 현실을 웬만해선 똑바로 마주보려 하지 않는다. 아마도 그 피해가 얼마나 심각한지 알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회피하려는 것일 테다. 더 심하게는 자식을 추궁한다. 너의 옷차림 때문이다, 그 사람이 그랬을리가 없다 등.. 내가 저런 말을 들었다면.. 정말 끔찍하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직간접적으로 경험을 해봤기 때문에 대강은 짐작 가능하지만, 내가 겪은 일이 언론에 나왔다면? 난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난 가끔 피해자들에게 어떤 말을 어떻게 해줘야 하나 상상을 하곤 하는데, 이런 케이스만큼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내 애인들이 겪었던, 그리고 내가 위로해줬던 말들은 매우 순한 맛일테다. 

 

어차피 타인은 남이다. 내 일에 분노하고 도와줘도, 최선의 경우 결국 극복은 내가 하는 것이 되고 최악의 경우 술자리 안주감이다. 널리 알려질수록 최선보다는 최악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인간 개개인은 때때로 선할 지라도 인간 집단은 대체로 악하기에. 나도 내가 겪었던 일이 더 공론화되기 싫었던 것처럼(상담센터에서도 도와주겠다 했을 때 내가 거절했다) 피해자 분도 죽기보다 더 싫었을 것이다. 

 

누가 감히 싸디 싼 위로의 말을 던질 수 있을까. 아무리 그때 제대로 엄벌에 처해도 설사 100여명이 넘는 직간접 가해자들을 싹다 사형시켰어도, 그게 곧 상처의 치유는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치유할 수 있을까.. 솔직히 난 잘 모르겠다. 송백권 사건을 보면 알 수 있듯 그런 종류의 상처는 정말 치유가 어렵다. 오죽했으면 2번의 결혼 생활 실패 후 가해자를 직접 죽일 생각을 했을까. 

 

더 암울한 사실은 이러한 성범죄는 지금도 어디선가 일어나고 있으며, 2차 피해도 온전히 피해자가 뒤집어쓰는 구조이며, 피해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은 평생 묻어두고 살거나 운이 좋아 상처를 어루만져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것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나는 왜 이 글을 쓰고 있을까.. 처음엔 무언의 감정에 휩싸여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 이 글마저도 최근의 가십거리에 삘이 꽂혀서 그저 내 얘기를 풀어놓고 싶은게 아닌가를 깨달았다. 옛날에 감명 깊게 봤던 『콘스탄쯔 이야기』라는 웹툰도 떠올려 보지만, 결국엔 뭔가 다시 원점인 느낌. 누군가에 의해 망가져버린 내 한 쪽의 서랍을, 다시 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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