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윤회(輪廻) - 『모노노케 히메』

그녀의세계 2023. 5. 9. 10:46

개인적으로 지브리 애니, 특히 옛날 작품을 매우 좋아한다. 애니메이션으로는 보기 드문 깊은 내용을 담고 있기도 하고, 그렇다고 마냥 무겁지만도 않고 어느 정도 동화같은 느낌도 주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지브리 작품 중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단연 첫 손가락에 꼽을 만한 작품이다. 누군가에게 지브리 작품을 추천할 기회가 생긴다면 주저하지 않고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제일 먼저 추천할 것이다. 그 다음으로 꼽을 작품이 바로 [모노노케 히메]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가장 훌륭한 작품이라고 생각함에도 [모노노케 히메]를 가장 먼저 정리해 보는 것은 그만큼 많은 생각을 하게 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을 처음 봤을 때 맨 먼저 하게 되는 생각은 무엇일까. 자연이 인간에게 보내는 경고? 자연과의 상생? 이런 상투적인 이야기를 풀어내는 작품이라면 난 역사상 가장 성공한 애니메이션이었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다음으로 이 작품을 놓지 않았을 것이다.

이 작품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나도 이 작품을 처음 봤을 때는 자연을 파괴하는 무리에 맞서는, 인간에게 버려지고 자연에 동화되어 살아가는 한 소녀의 저항 일대기인줄 알았다. 그리고 마치 노아의 방주처럼 사슴신에 의해 모든 갈등이 파괴되어 새로운 생명의 순환 주기를 맞이하는 결말로 끝나는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단순히 그런 이야기를 풀어내고 싶었다기엔 여러 장면에서 임팩트 있게 던지는 메시지가 너무 많았다. 사실 처음부터 그 떡밥을 던지는데, 증오에 사로잡혀 재앙신이 된 산신이 아시타카의 팔뚝에 저주를 남기고 죽는다. 이 때문에 아시타카는 마을에서 추방당하는데, 언뜻 보면 불경한 저주를 받은 몸이 된 아시타카를 내쫓는 흐름이지만 훗날 결말을 고려해보면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 다양한 존재들과 맞부딪히면서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얻음으로써 저주를 자연스럽게 푸는 전개로도 생각할 수 있다. 여기서 얘기하는 지혜라는 것은, 나를 둘러싼 주변과 완전히 동화되어 그 누구도 증오하지 않고 살아가는 경지에 도달하는 것을 의미한다(이게 되면 성인의 영역이겠지.. 이걸 해냈으니까 또다른 제목이 아시타카의 전설인 것이고). 실제로 아시타카가 처음 맞부딪힌 세상은 증오와 원한의 한복판인 전쟁터였다. 이 때는 저주의 힘을 제어하지 못하는데, 특히 자연을 파괴하는 니보시를 만나는 장면에서 절정에 달한다.

하지만 이야기는 평면적으로만 흐르지 않는다. 니보시를 만나 분노를 느끼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마을 사람들과 부대껴 지내면서 활기와 상생을 배운다. 여자가 활기찬 마을은 건강하다는 그의 대사는 상당히 의미심장한 대사다. 분명 상황 상 힘이 지배하고, 남성주의적인 분위기여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삶의 터전을 놓고 싸우는 전쟁터임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여자를 힘으로 지배하지 않고, 여자는 자기 역할을 다하며 남자에 주눅들지 않는다. 이게 바로 주역에서 말하는 음과 양이 서로 보살피는 태극의 문양과 합일하는 상황일 것이다. 여자의 생활상도 그렇거니와 나병 환자들에게도 니보시는 존경받는 존재다. 아시타카는 이를 보면서 입체적인 관점에 슬슬 눈을 뜨기 시작한다.

물론 주변 상황은 아시타카가 순조롭게 경험을 쌓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원령공주와 니보시의 세력 다툼에 휘말려 가슴에 총을 맞는 큰 부상을 입기도 하고, 둘 사이를 중재해보려고 하지만 잘 되지 않는다. 처음에 그를 경계했던 원령 공주는 그를 시험할 요량으로 아시타카를 사슴신이 사는 숲에 보낸다. 재밌게도 생명을 관장한다는 사슴신은 아시타카의 총상을 치유해주지만 저주를 없애주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해석하기 나름이겠지만, 일단 살려준 것부터가 아시타카가 허무하게 저주에 몸이 먹히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 꿰뚫어보았기 때문이고, 총상은 치료해줬지만 저주를 없애주지 않은 것은 저주의 존재로 인해 앞으로 나아갈 길과 수행할 역할이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라 생각한다.

여기서 잠깐 눈을 돌려 사슴신의 존재 의미에 대해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사슴신은 작내 등장하는 자연을 대표하는 모든 신들의 상위에 존재하는 신이다. 마음대로 생명을 빼앗을 수도, 부여할 수도 있다. 그의 전지전능함은 첫 등장에서부터 묘하게 묘사된다. 그가 지나는 자취는 생명이 났다가 진다. 생명을 관장하는 신이라며 왜 꽃을 피게 했다가 또 지게도 할까. 곧 그것은 그의 자취는 생명의 순환 그 자체라는 것이다. 여기서는 alive가 초점이 아닌 cycle이 초점이다. 생명을 관장하는 신이지만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신]에서 등장하는 신처럼 모든 생명에게 관대한 신이 아닌 모든 생명에게 큰 의미를 두지 않는 신인 것이다. 이걸 나쁘게 얘기하면 무심하다, 무능하다라고 표현도 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사슴신의 속성은 인간과 자연의 전쟁이 벌어졌을 때 더욱 부각되는데, 산신의 수장인 옷코토누시가 증오를 누르지 못하고 재앙신이 되어 구원받고자 사슴신을 찾는다. 사슴신은 자비로우면서도 냉정하게 옷코토누시의 생명을 거둔다.

자비로우면서도 냉정하게?

살아있는 생명이라면 누구나 생존을 갈망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여 생명을 '선', 죽음을 '악'으로 단정짓지만 그런 이분법적인 사고를 가볍고 차분하게 깨뜨리는 행위를 선언하는 장면이다. 이 세상에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그 신은 그 누구에게도 자비롭지 않은 신이다. 그저 때가 되면 생명을 거두고, 부여하는 일을 반복할 뿐이다. 그 과정에서 평화가 지속되든, 전쟁이 끊임없이 발발하든 관심 밖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신]에서 인상깊었던 장면이 있다. 견습 신들이 실제 지구를 마치 시뮬레이터처럼 사용하여 누구의 지구에서 문명이 빠르게 발전하고 인간이 번성하는지 시험하는데, 야만적이고 폭력적인 방법을 써서 빠르게 문명을 일궈낸 견습이 더 좋은 점수를 얻는다. 문명은 살짝 뒤떨어졌지만 적어도 평화적이고 고차원적인 방법을 쓰지 않았냐고 묻자 철모르는 아이를 대하듯 답변한다. 수단이 중요하지 않고 결국 개체수로 결정나는 것이라고.

얘기가 약간 샜는데, 결국 사슴신의 역할은 생명을 살리는 것이 아닌, 말 그대로 자연의 이치를 수행하는 역할일 뿐이다. 그러면 자연의 이치는 뭔가.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지만, 그래도 영원한 불변의 진리가 있다면, 모든 것은 변한다는 그 사실 자체다. 그것만이 삼라만상을 관통하는 유일한 진리가 될 수 있다고 감히 생각해본다. 하지만 그렇게 전지전능할 것 같던 사슴신도 완벽한 존재는 아니다. 인간의 탐욕에 의해 목이 잘리고 나니 그 또한 폭주하여 재앙신보다 더 끔찍한 재앙 그 자체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죽음을 무릅쓰고 아시타카와 원령공주는 목을 되돌려주자 쓰러지고 그 자리에 새로운 생명이 싹트고, 코다마 하나가 슬쩍 나오며 작품의 끝을 맺는다.

지구의 역사를 생각해보면 자연에서 살아남기 위한 종 간의 생존 경쟁은 항상 있어왔고, 우위를 점한 종이 번성하다가 특수한 이유로 우점종의 지위를 잃는 것은 반복되어 오던 역사였다. 페름기 말 대멸종, 백악기 말 대멸종 등 지구는 5번의 대멸종을 거쳐왔다. 어쩌면 인간과 여타 종간의 전쟁은 그와 같은 맥락으로 생각할 수 있다. 번성 속도나 그 수단에 대해서는 많이 다르겠지만, 크게 봤을 때 종 간의 생존을 놓고 치르는 전쟁이라는 점은 같다. 그렇다면 이 작품이 시사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자연 파괴는 지구 역사를 놓고 봤을 때 어쩔 수 없는 수순이므로 신경쓸 필요가 없다라고 하기엔 이 작품은 그리 염세적인 느낌을 풍기지는 않는다. 마지막에 아시타카와 산이 결혼하여 각자 위치에서 융합하며 사는 장면을 보더라도 그렇다. 깊게 생각해볼 수록 이 작품이 어떤 명확한 주제 의식을 가지고 청자와 대화를 하려는 것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사상은 있다. 바로 모든 것은 돌고 돈다는 것이다. 물이 중력의 흐름을 따라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고, 바위를 만나면 빗겨 흐르고, 열을 만나면 상승하여 구름이 되고, 비가 되어 다시 내리는 과정을 순환하는 것처럼. 자연의 이치에 따라 흐름에 몸을 맡기고 그를 거스르는 마음을 가지지 않게 되면 그 무엇도 미워하지 않게 된다. 마치 모든 과정을 겪어낸 아시타카의 몸에서 저주가 풀린 것처럼. 물론 평범한 사람은 평생을 걸쳐 수련해도 그 '저주'를 풀긴 쉽지 않다. 오히려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이문열이 얘기했던 금시조와 같은 것이다. 죽음으로써 자연의 일부로 돌아가야 비로소 완성되는. 그 전까지는 一日淸閑, 하루하루를 맑고 한가롭게 사는 것이 살아 있는 동안의 최선이 아닐까 생각한다.